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인식하는 것들 중에는 참으로 묘한 부분이 있다. 그 중에서도 밖에 있는 사물은 아무리 끌어들여도 결국은 자신의 밖에 있게 되고, 안에 있던 생각들은 아무리 몰아내고 그렇지 않은 척 해봤자 대개는 그대로 자기 안에 있을 뿐이다. 일반적으로는 아무리 애쓰며 노력해 봐도 안팎의 모든 것들은 위치만 조금 바뀐 채 안의 것은 안에, 밖의 것은 그대로 밖에 있기가 일쑤인 것이다. 그런데도 많고 많은사람들이 조금 바꿔보려는 그것을 거의 일평생을 같은 방식으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너무도 흔하게 접하면서 살아간다. 바뀔 수 있고 바뀌어 지는 것은 그것들을 다룰 수 있는 사람 자신의 능력일 뿐인데도 말이다. 어째서 인류가 지구상에 자리한 이래로 사람들은 같은 방식을 계속 반복하면서 살아가는 것일까? 드러난 모습만으로는 아무리 살펴보고 짐작해 보고 생각을 해봐도 도통 감이 잡히질 않았던 적이 있었다.
나 자신도 오랫동안 그렇게 살았었다. 그래서 "더 좋은 방법은 없을까?" 해서 몇 종교와 이곳 저곳 수행단체를 기웃거리며 물어보고 찾아 다녔지만, 이렇다 할 소득도 얻지를 못하면서 허송 세월로 느껴지는 기간이 꽤나 오랫동안 지속될 즈음에는 '먹고 사는 일이 정말 쉽지가 않다'고 느꼈던 적도 많았다.그래서 '더 좋은 방식'을 찾는 것을 포기하려고도 했지만 쉽사리 잊혀지지가 않고 더 깊이 뇌리에 박히는듯 하여서 괴로움에 몸부림을 쳤던 적도 많았으며, 심지어는 공원에서 종이 상자를 깔고 신문지를 이불 삼아 잠을 청하면서 날을 세운적도 있었다.
그러던 중에 "정말, 좀 더 자유롭게 사는 방법은 없을까?"하면서 밥맛이 없을 정도로 골똘히 집중하게 되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몇 차례의 단식을 거쳐서 드디어는 죽음을 각오로 사생결단을 하는 단식이 되어서, 긴 기간을 물만 조금 마시는 정도의 단식을 하게도 되었다.지금 돌이켜 보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무모했었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 땐 젊은 혈기이긴 했으나 너무도 절실했었다는 느낌이다. 그렇게 해서 백팔일이 되던 날 아침, 바쁘게 출근을 하는 이웃사람들의 모습이 우연히 눈에 들어왔고, 그 모습과 내 모습이 겹쳐지면서"저 사람들이 정상적인 사람들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고,"나는 정상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 있구나! 지금, 이 꼴이 도대체 뭐란 말인가?"하는 강한 느낌이 들면서, "정상적으로 밥을 먹고 정상적으로 활동을 해야 정상적인 사람이다!' 라는 <울림>에 정신이 번쩍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 순간이 바로 나에게는 내 "생각"이 처음으로 보였던 때였다. 그 때까지는 늘 내가 생각을 하면서도 생각 그것을 바로 나 자신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 때까지 "자신이 하는 생각을 생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로 착각을 했었던" 것인데, 그 순간부터는 '내가 하는 생각은 내가 아니라는 것'이 확연해졌던 것이다. '나'는 생각과 따로 떨어져 있으며 생각을 떠 올릴 수 있는 <생각의 주인>이더라는 것이다. 삼,사십년 사이에 생각을 알아차리는 방법도 많이 진화하여 이제는 누구든 어렵지 않으면서도 재미있게 할 수 있는 방법까지 나왔으니 참으로 격세지감이다.
그렇게 쉽지않은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계기가 더해서 더 깊이 있게 연구하거나 경험하고 터득하신 분들과 가까이 하게 되면서 내면세계의 탐구를 하였던 것이다. 그 때 부터는 바깥으로 향하기만 하던 자신의 주의를 내면을 향하도록 하였던 셈이다.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자유와 평화라는 개념이 현실로 자리를 하게 되었고 삶은 차츰 안정을 찾게 되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길은 사람마다 다를 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시작된 곳-의식-에서 해결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
사람이 지니고 있는 이 <알아차리는> 능력을 주의 깊게 탐구해 보면,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잘 다스리고 처리하게 되어 평안을 유지할 수 있게 되면, 밖의 것들은 따라서 자연스레 정리되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하는 것을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이라고 해왔지만, 지금까지 이 말은 가장 흔하게 쓰는 말이면서도 아주 애매모호한 말이기도 하다. '마음을 다스린다'는 말은 하면서도 '어떻게 하는지?'를 알려 주거나 가르쳐주는 곳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마음을 다스린다거나 마음을 다룬다는 것은 자기가 생각을 떠올리기도 하고, 지우기도 하는 능력을 일컫는 말이다. 이것은 생각을 이리 저리 궁리를 한다거나 짜 맞추는 정도의 비효율적인 것이 아니라, 생각들을 잘 느껴보면 모든 생각은 가장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 가장자리를 알게되면 생각을 지어내기도 하고(창조), 지워 없앨 수도 있는(소멸) 매우 유용하게 쓰여질 누구나 타고나는 엄청난 능력이다. 이 능력을 일상생활에 부려 쓰는 것이 삶을 참으로 사는 비결인데도, 정말 제대로 쓰고 사는 이는 아직 흔하지가 않는 듯하다
이 능력은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갖고 태어나지만 오랫동안 거의 사용하지를 않아서, 매우 세심하게 주의를 기우려 접근하지 않으면 밝혀지지가 않으며, 또한 밝히려고 의도하거나 계발하려는 의지를 갖지 않으면 거의 드러나질 않아서 쓸 수가 없을 정도로 숨겨진 능력이 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 능력은 누구든 노력하는 만큼은 계발되고 계발된 만큼은 일상에서 쓸 수가 있게 되는 것은 지혜의 공평한 작용일 것이다.
이런 놀라운 능력이 누구에게나 잠재해 있다고 경전들은 전하고 있지만, 종교나 학문(심리학, 철학, 교육학, 의학 등) 어디에서도 찾아내어 키우거나 가르쳐 주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능력이 잠자고 있음은 물론, 오랫동안 거듭하는 자기의 생각에 가려져서 일상을 허둥대거나 안과 밖을 따로 구분하면서도 함께 다루려고 안간힘을 써보기도 하지만, 끝내는 제 풀에 꺾여서 주저앉게 되는 것을 흔히 볼 수가 있는 것이 지금 우리네 현실이다.
아직도 능력이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안팎을 구별하는 그 생각을 실마리로 하여 지혜와 능력을 키워 나갈 수 있다고 귀 띔을 해줘도 ‘정신 나간 사람의 무슨 헛소리’라는 투로 반응하기가 십상이다.
그렇듯 자기의 생각에 자신이 속아 살고 있음을 눈치 채지도 못한 채 많은 사람들이 이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이 세상에 왜 왔을까?”, “나는 누구인가?” 또는 “내가 진실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등의 생각들을 한번만이라도 깊이 새겨 본다면 좀 더 자유로운 삶을 살수가 있을 텐데도...
그리고 한번만 제대로 경험을 하고 보면 안과 밖이 따로 존재하지 않고, 결코 둘이 아닌 것을 알게 된다. 사실, 이것이 크게는 사람의 '생(生)과 사(死)'와도 연관되어 있는 면이기도 하다. 생각으로 보면 틀림없이 안과 밖이 따로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의지를 갖고 자신의 생각을 살펴보는 기회를 갖게 되고 생각과 자기가 분리되는 경험을 하게 되면 안과 밖이 어떻게 창조되는지?를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밝혀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안과 밖을 만들어서 존재하게 하거나 유지시키는 것은 생각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이런 원리는 삶의 깊은 의미를 탐구해온 극히 소수의 사람들이 노력한 보람으로 희미하게나마 이어왔고, 그것도 일반 대중들에게는 알려주려고 해도 거의 관심을 보이지를 않았지만,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차츰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사회가 인성이나 감성이라는 용어에 명상이나 상담이라는 의미와 사회복지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사람자체와 의식에 대한 탐구 작업이 일상생활에 어떻게 쓰여 지는지?에 관하던 것이 드디어는 출발점인 의식으로 새롭게 비춰진 정도이다.
본래 ‘순수하고 한계 없는 순수의식’이 ‘나’를 경험하기 위해 한계(가장자리)를 만들었기에 누구든 그 한정지었던 생각(도구)을 자유롭게 다룰 수가 있게 되면, 그 순간부터 한계로 느껴지기만 하던 불편함은 자연스레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안팎으로 구분하던 분별심이 사라져서 본래의 한계 없는 자리로 돌아오는 과정이 바로 “삶의 여정”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이 <본래의 나>는 직접 체험으로만 알아지게 되는 상태(경지)로써, 생각의 가장자리를 벗어나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자들만이 알아차리게 되는 점이 특이하다. 지적으로(머리로) 아무리 알려고 해도 알아지지가 않는 사고 작용 너머의 “평안”이나, “고요자체”라고도 표현해 보지만, 말의 뜻으로는 도저히 미치지가 못하는 곳이다. 이 상태의 경험은 생각으로는 아무리해도 짐작될 수도, 헤아릴 수도, 알아지지도 않는다. 이것은 "생각을 하는 한은 생각의 범주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특별한 소수의 사람들만이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은 참으로 우리 모두의 희망이고 놀라운 창조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누구나 자신이 하는 생각의 경계(가장자리)를 벗어 날(넘어 갈) 수가 있는 것이다.
왜 이런 경험이 필요한가? 하면, 이 경험은 ‘생각’이란 ‘도구’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생각을 하면서 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자체를 살펴보지를 않고 생각이 곧 자기라고 인정하는 잘못을 범하면서도 거기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살기 때문이다. 생각은 자기가 아니라, 자기가 부려 써야할 도구이다. 도구인 생각이 자기와 같은 위치에서 밀착되어 있다는 것이 실감이 되는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이게, 도대체 뭔 소리 !” 할 수도 있다. 생각의 주인인 사람들이 자기 본래의 주인자리를 찾으라!는 말이다. 그래서 편하게 경험하고 즐기는 삶이 되라고 권하는 것이다.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알수는 없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근심이나 걱정을하거나 어려움이나 괴로움을 겪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을 일반적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는 쓰레기 같은 생각들인가?생각에도 몹쓸 생각 즉, 생활 쓰레기보다 더한 버려야할 쓰레기의 생각들이 있다. 앞에 예를 든 생각같은 것들은 얼마나 오랜 세월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버리지를 못하고 있어서 그 생각대로 삶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만 한다면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쓰레기가 보이면 줍듯이, 쓸데 없고 도움이 않되는 생각들을 보는 능력이 생기면 없애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자신의 생각이 보여야 자신과 생각을 분리시키고 버리는 능력이 커지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히 행복하고 신나는 생각을 선택하게 되어서 일상은 자연스레 신나고 행복해져서 자유롭고 평화로움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 바로 자신의 삶의 청사진이라는 것을 실감하는 삶이 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생각과 분리되어 본래의 주인 자리를 회복하면 스스로 삶의 방향을 완전히 자유롭고 평안하도록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이 체험 후에 삶의 모습은 쓸데없는 생각들이 사라져서 뭔지 모르게 홀가분하고 안정감을 풍기는 정도지만, 입장은 완전히 바뀌어서 지금 여기의 삶만이 실재하며 모든 것이 진실로 합당한 균형을 이루어감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세상 안에서 함께 살지만 점차 세상사 형편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가 형편을 만들어 가면서도 고요하고 여유로움이 풍기는 창조하는 삶을 이루며 살게 된다. 이 행성에서 행위 하면서도 행위 그것에 집착함이 없이 그저 실천하는 된 사람인 것이다. 그는 실제로 평화를 사는 사람인 것이다. 세계 평화의 섬인 제주에서 이것 말고 더 무엇을 할 일이 있겠는가?
지금 당신은 정말 그럴 수가 있을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상태는 누가 뭐라고 하던 상관없이 실제하는 현실의 삶의 상태이다. 이 말은 ‘당신도 실제로 해보면 진실로 가능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습관적으로 생각만 하지 말고... 충분한 의도만 갖는다면 당신도 형편이나 생각에 끌려 다니는 습관적 삶이 아니라, 스스로가 이제는 삶을 다스리면서 자유로움을 즐기는 존재가 될 수가 있게 된다는 뜻이다. 이런 자유는 안과 밖으로 구분되어지던 것들이 모두가 자기 안에서 이루어지면서 자기가 자신을 이끌게 되고 모든 존재들을 존재 그대로 보고 바로 알게 되는 것이다. 이 때가 비로소 마음과 물질이 둘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생각이 물질화하는 우주적인 원리를 꿰뚫어 알게도 되는 것이다.
이 전의 습관을 통해 들어왔고 애지중지하던 모든 정보와 지식의 허망함을 사무치게 느낄 수가 있음을 덧붙여 둔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들어와 있는 수없이 많은 정보들이 체험되지 않은 채로 여러모로 이것 저것 척척 답할 수 있는 유식한 사람이기는 하겠지만, 그것들을 고요하게 지켜보면서 꿰뚫어 아는 깨달은 사람은 결코 아니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은 눈에 띄기가 쉽지 않은 것이며, 유식한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고 눈에 띄는 것은 유식함만으로는 고요해질 수가 없기 때문인 것이다.
생각너머의 경험은 누구에게나 더 이상 외부에서 뭔가를 구하지 않고 삶 자체가 스승이 되기에, 당연히 고요해지고, 안정되어져 어떤 동요에도 휘말리지 않고, 지켜보고 아는 입장이 된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곳에서나 나서지는 않아도, 존재하는 그 자체로 우리사회와 우주의 질서를 지키는 커다란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는 우주의 원리대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드러나서 눈에 보이는 세계의 모든 활동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음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 그는 보이지 않는 곳의 힘에 협력하면서 보여지는 세계가 좀 더 평화롭고 활기차도록 이끌어가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 질 수도 있다. 여기에서 유식한 사람과 '꿰뚫어 아는 사람'은 완전히 다르게 존재하고 활동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생각이란 어떤 사물의 결과이므로 이것을 꿰뚫어 알아야만 휘말리지 않는다. 사람은 언제나 생각밖에 있을 수가 있고, 그래서 생각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는 존재들이다. 생각은 경향성이 있어서 같은 진동의 생각들은 끌어와서 드디어는 모양으로 드러난다. 이것이 생각이 물질이 되는 창조의 원리이다. 원하거나 원하지 않거나 알거나 모르거나 관계없이 같은 진동의 생각들은 서로 끌리고 모아져서 우리들이 경험하는 현실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원하지 않는 경험들이 창조되는 것은 처음에는 경험을 하기위해 선택한 생각이었지만 진행되는 과정에서 창조할 때와 관점이 바뀌어서 잊혀 진 것이 경험이 되려고 드러나는 것이다. 이럴 때 경험되지 못한 생각들은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유념해 두어야 할문제점이다.
우리는가능한 한 생각들이 경험되어 사라지도록해야겠지만, 그렇지 못하는 생각들은 쌓이지 않도록 고요를 유지하는 것이 편안함과 자유로운 삶을 이루는 좋은 방법일 것이다. 그래서 생각을 다루는 방법을 배우고 익히면 신나고 행복한 삶을 창조하는 생활이 가능한 것이다. 누구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