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다르게볼 수가 있다
우리 일상의 주변에는 외형적으로 거의 모든 것을알 수 있도록 많은 책들이 나와 있다. 또,학교와 연구소, 학원 등에서 많은 학자와 선생님 또는 어른들이 알려 주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는 알고 싶어하는 모든 것들을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나 책은 거의 없다. 그렇지만,늘 의문은 생겨나고 있다.
그래서 일상을 같은 모습으로 바라보게 되고, 시선이 가거나 집중되는 것들은 내면을 보지 못하고 외형에만 한정되는 것이 안타깝게 느껴질 수도 있다.
어떤 경우에는 마음으로 헤아리지 못하고 지나쳐서야 후회하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럴때 가끔씩이라도 조용히 있게 되는 경우가 있다면, 내면을 향하여 자기에게 물어보라.
'이것이 나의 삶에 진정 어떤 도움이 될까?' 이것이 삶에 참으로 진보와 향상을 위한 중요한 것일까?' 그러면 아마 그 의문점 자체가 서서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이 아니기에 답을 구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인생은 참으로 단순하다. 누구든 제대로 살면 참은 경험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더욱 넓어지고 지혜로워지며 성숙하게 된다. 그렇게 뭔가 나아지거나 성숙되면 그것을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나누어 주거나 전해주고 싶어지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수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관점에서 쓰는 많은 책들이 출판 되고 있다. 그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사람은 누구든 책으로 엮어낼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하고도 많은 경험을 하며 살고있다. 이 경험들을 생각을 통하여 표현하는 것은 생각의 수 만큼 많은 것이 정상이지 않을까?
생각의 표현이 생각의 소용돌이 자체에 휘말리지만 않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사라져 버릴 생각이 아니라, 영적 성장의 멋진 도구가 될 것이다.
신성이나 불성, 영성은 모두 같은 의미이다.
사람들의 의식이 깨어나지 않았을 때는 신성을 외치다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을 당하기도 했었다. 과거에는 그런 일이 벌어 졌었다. 이것은 특정 종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의식이 많이 깨어난 지금은 '당신은 신성을 가지고 있다.','당신은 신성 자체이다.'를 편하게 말할 수 있게까지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진리라고 하더라도 경험되지 않은 상태에서 경전에 있다거나 들었다는 생각을 기준으로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생각 속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경험을 통하여 자신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그 넘어의 신성을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자기 안에 육체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함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당신은 육체 그 이상의 존재라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하며 살 수가 있다.
많은 분들이 고향을 그리워 하는 것은 그 곳이 진정 물질적으로 풍족해서 일까? 그럼 계속하여 고향에 그대로 사는 사람들은 무엇을 그리워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