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정에도 길이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지만,
반 이상의 사람들이 처음으로 여기를 찾아 올 때는
자신이 가진 문제 하나를 해결해 보려고 찾아온다.
그래서 어떻게든 빨리 빨리하려고만 하면서
뭔가 신비한 능력이나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뭔가를 찾거나 의지하려고 애쓰는 것을 보게된다.
그런 사람들에게 뭘 찾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거의 모두가
자기들과는 다른 뭔가가 있지 않겠느냐? 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눈으로 보여지고 확인될 수 있도록 드러나는 것이라면 어떻게든 보여 주겠지만
당장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사람의 내면세계나
정신 작용을 다루는 능력은 아직까지 별다른 좋은 방법은 없다.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당장은 실망이 되지만,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 간다는 것은 크던 작던 문제의 연속일진데
당면한 문제 하나를 해결한다고 해서 자기 자신이 뭐 크게 달라지겠느냐?
그래서 그 보다는 "자기 삶에 문제가 왜 일어나는지?",
"자신이 가진 문제가 왜 안풀리는지?"
"어떻게 하면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고 살 수 있는지?"를
알아 차리는 것을 익히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그렇게 되면
앞으로는 문제에 휘말리지 않는 삶을 살 수가 있으며
다음에 혹시 어떤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그땐 스스로 대처하거나
해결할 수가 있어서 좋지 않겠느냐?고 하면 거의가 수긍을 하면서
그렇게 하겠다고들 한다음 실제로 터득하여
무겁다던 짐을 털어 버리고 가볍게 자신의 삶으로 돌아간다.
정말 문제라고 한다면,
어떤 사람들은 지금 순간에도 문제를 생각하고 있지만
거기에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까지 상상하면서 까지
어떻게 해결할 거라는 생각을 더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로지 '문제를 생각하는 것'에 대부분의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문제가 없으면 문제 없는 것 조차도 문제를 삼는다.
이를테면, 일상에서 걱정에 걱정을 더하여 끈임없이 걱정이 끝나지 못하게 하면서
스스로가 걱정속에 파묻혀 해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우리 인간은 자기가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현실로 다가오고
다가온 그 것을 경험하는 참으로 대단하고 신통한 존재들이다.
문제를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 무엇이 다가오고, 무엇을 경험하겠는가?
해결을 잘하는 사람은 해결에 주의를 잘 기울이는 사람인 것이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에 어떤 차이가 있겠는가?
긍정적으로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긍정도 부정도 다 같이 하나의 생각이기는 매한가지다.
우리의 삶에는 어떤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특별한 원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원리가 있을 뿐이다.
그것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오직 자기의 주의가 기울여져
생각하는 것(신념)을 겪어가게 되는(경험하는) 것이다.
즉, 자기가 하게 되던가 하는'생각이 현실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로 드러난 뒤에 고치려고 힘들어 할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이 하는 생각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알아 차리고
그렇게 아는 능력을 일상에 제대로 쓰게 되면 그 전과는 달리
밑바탕에 있던 갖가지 감정에 휘말리지 않을 수가 있으며
경향성 같은 마음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배후에서 늘 함께하고 있는 형언할 수 없는 본래의 자기와 마주한다.
그리하여 삶은 자기가 의도하고 결정하는 대로 이루어 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정하는 것이 창조하는 것'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고
삶은 신나는 놀이가 되는 것이다.
그 후로는 삶 자체가 스승인 것이다.
생각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확실히 알아 차리면
삶은 지난 날과 다른 입장에서 경험할 수 밖에 없다.
어느 누가 자유를 버리고, 부자유한 올가미를 계속하여 쓰고 있겠는가?
이 세상의 삶은 몸을 갖고 생각이라는 도구를 다루어 졸업하는 의식의 여정 중
태어남의 문과 죽음의 문 사이의 지금은 길어야 100년 내외의 한정된 순간인 것을
길이 있는데도 마다하고 괴롭게만 경험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자신도 모르게 순간 순간 되어지는 생각들을 어쩌지 못하여
끄달려 살기 보다는 뜻을 가지고 잘 찾아 보면
자신의 생각을 다루어 의도적으로 사는 길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