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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과 주관적

객관적과 주관적, 이 두가지의 개념을 잠깐 짚어보고 난 다음에,

그것이 우리네 삶에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누군가가 현실이라고 여기는 인식의 범주를 구별하기 위하여

'객관적'과 '주관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객관적'이라 함은 마음 밖에 있는 현실을 말하고,

'주관적'이라 함은 마음 안에 있는 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거실 한곳에 화병이 있으면 당신의 마음 밖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객관적 현실이 됩니다.

당신이 그 화병을 아름답다고 생각을 합니다.

'아름다운 화병'이라는 그 생각은 당신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것은 주관적 현실입니다.

이 때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객관적'이라는 개념은 둘이 서로 교차되기까지는

매우 합리적으로 그 범주를 나누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컨데, 모든 사람들이 거실 한곳에 있는 화병을 아름답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화병은 박물관에 놓여지게 되면서 수 많은 예술 평론가들과 사람들이 찾아가서

그 아름다운 화병을 감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주관적 현실이었던 '아름다운 화병'이 여러 사람들이 동의함으로 인해서

하나의 객관적 현실의 성질을 갖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하여서 아름다운 화병은 당신의 마음 밖에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의 창조가 '주관적'에서 '객관적'으로 아주 당연하게 흘러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자세히 살펴 본다면, 이것은 '신념이 경험에 앞서 있다'는 원리의 드러남이 됩니다.

 

보다 더 바탕이 되는 것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거실 한곳에 '무엇'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마음 밖에 있는 객관적 현실입니다.

"나는 저것을 화병이라고 이름을 붙이리라"는 생각은

당신의 마음 속에 있으며 그것은 하나의 주관적 현실입니다.

다른 사람은 자기의 주관적 현실에서 그것에 다른 이름을 붙일 수도 있습니다.

"아~ 저건 말이지, 저것은 '옛날 술병'이야."

거실 한곳에 있는 무엇에 이름을 붙이는데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그것의 이름은 주관적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그것을 '옛날 술병'이라 부르는 한쪽의 그룹이 있고,

그것을 '화병'이라고 부르는 다른 그룹도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이제까지 물어온 의문중 가장 위험한 의문이 있습니다.

"누가 옳은가?"  '옳음'은 주관적입니다.  맞나요?

'옛날 술병'이라고 여기는 무리에서는 '옛날 술병'이 옳습니다.

'화병'이라고 여기는 무리에서는 당연히 '화병'이 옳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당신이 거실에 있는 '무엇'을 논하기 보다

다른 정치나 종교적인 확신을 논하자고 한다면 어떨까요?

누군가가 당신의 종교적 확신이 하나의 주관적인 것일 뿐이라던가,

또는 당신의 정치적 확신이 주관적인 것일 뿐이라고 지적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대화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까요?

 

어쩌면 목숨에 영향을 끼칠 정도까지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을,

이 순간에도 아프가니스탄 사태가 사무치게 전하고 있지 않나요?

사람들은 '자기의 주관적 의견을 방어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